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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과 전설

평정공노촌이선생유허비(平靖公老村李先生遺墟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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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870회 작성일 19-07-01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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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정공노촌이선생유허비(平靖公老村李先生遺墟碑)

강당인 노촌당과 사당인 청백사 사이에 있는 유허비는  양천동 하리 199번지 노촌선생의 생가 터에 1846년(헌종12년) 세워졌던 것을 1981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고 비각을 세웠다. 이약동의 외손으로 형조판서를 제수받은 홍직필(洪直弼(1776-1852)이 찬하고 이조참의 이석찬이 글을 썼다.



영남의 금산(金山) 고을에서 남쪽으로 15리되는 하로(賀老)의 마을은 곧 노촌(老村) 이선생이 태어나시어 편히 사시던 유허(遺墟)이다.

선생은 이곳에서 나고 이곳에서 돌아가셨으며 또 이곳 서원에서 향사를 받으니 이것이 바로 죽어서도 한갓 향리를 떠나지 않는 의리가 되는 것이다.

한문공(韓文公 : 唐나라 문호 한유(韓愈)의 시호가 文)이 이른바 자손은 그 고을을 떠나지 않음을 법도로 하여서 죽으면 사(社)에서 제사를 받는 자이다.

선생의 휘는 약동(約東) 자는 춘보(春甫)이니 정통(正統) 신유년(辛酉 : 1441)에 진사가 되고 경태(景泰) 신미년(辛未 : 1451)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올라 청환현직(淸宦顯職)을 차례로 거쳤으니 다섯 고을을 맡아 다스리고 세 군영을 통제하였으며 또한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 서울에 다녀오고 마침내 이조참판으로 지중추부사에 올라서 벼슬을 그만두었다.
홍치(弘治) 계축(癸丑 : 1493년) 6월 13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78세이다.

선생은 일찍 깨달아 학문을 쌓고 경적에 널리 통하였으며 조정에 있어서는 충성되고 바른 말로써 백성을 건지고 세상을 바로 잡는 대책을 진언(進言)하였다. 탐라로부터 돌아올 때에 단지, 손에 채찍 하나를 잡았을 뿐이나 곧 말하기를 “이것도 섬의 물건이라”하고 관아의 누상에 달았는데 세월이 오래되니 채찍이 떨어졌으므로 고을 사람이 그 자취를 그림으로 그려서 사모하는 뜻을 붙이었다.

배가 가다가 돌풍을 만나 위태롭게 되었는데 막료(幕僚)가 숨겨 가지고 온 갑옷 한 벌을 찾아내어 바다에 던지니 풍랑(風浪)이 가라앉아 무사히 바다를 건너왔으므로 사람들이 그곳을 이름하여 투갑연(投甲淵)이라 하고 생사당(生祠堂)을 세워 제사(祭祀)지냈다. 이는 선생의 사소한 행실에 불과하나 또한 평소의 수양을 증험할 수 있다.

타고난 자질이 관후(寬厚)하고 뜻을 세움이 확고하였으며 산업을 경영하지 아니하고 겉치레를 좋아하지 아니하였으니 사람들이 감히 두 말을 하지 못하였다.

벼슬에 임하여는 강직하고 청렴하며 근신하여서 청탁이 통하지 아니하였으며 나이 늙음을 빌어 사직하고 생장(生長)하였던 시골로 돌아와 우유(優遊)하며 생애를 마친 까닭으로 명예와 실지가 순수하여 같은 시대에 살았던 어진이들이 존모하고 찬술(撰述)하는 바 되었으니 “옥호(玉壺)의 맑은 얼음” “옥수(玉樹)의 맑은 향기” “마음은 물과 달 같고 절개는 솔과 대 같다”는 등의 말이있다.

점필제(佔畢齊) 김공이 문무의 재덕과 시례(試藝)와 융률(戎律 : 군중의 법도)로써 조정(朝廷)에 돌아온다면 군덕(君德)을 계도(啓道)하는 책임을 질만하다고 인정하였으니 선생의 이같은 아망(雅望)이 어떠하였겠는가.

이제 선생의 시대로부터 300년이 넘었으니 세상에 남긴 아름다운 풍치가 아득히 멀어져 선생의 염결(廉潔)과 지조를 칭송한다면 육구몽(陸龜蒙)이 배에다 돌을 실음에 비기고 선생의 염퇴(恬退 : 고요히 물러감)를 논한다면 벼슬을 치우고 감호(鑑湖)에서 노니는 것에 비유할 수 있도다.

살피건대 명성과 사공(事功)이 융성한 치세에 빛나서 울연히 나라의 주석의 신하가 됨은 모두 학문에 바탕을 둔 것이 많다고 하겠다.

선생은 김 강호(金江湖)선생을 스승으로 섬기고 김 점필제, 조 매계(梅溪)와 더불어 도의(道義)의 사귐을 맺고 덕업(德業)은 포은(圃隱)과 야은(冶隱)의 유서(遺緖)를 잇고 행실과문장은 유림의 영수가 되며 사양하고 받아들임과 세상에 나가고 물러남이 각각 그 바른 도리에 맞으니 세상에 있어 큰 덕의 발로인 것이다.

무릇 남의 착함을 말함은 반드시 그 부형과 사우(師友)에 근본을 두므로 두터움이 지극한 것이다. 선생이 도에 나아가 덕을 이루는 것의 탁월함이 이 같다면 그 연원의 흐름이 또한 성대하지 아니한가.

선생이 졸함에 임금이 슬퍼하여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시호를 평정(平靖)으로 내리며 청백리에 뽑히고 후손이 대대로 녹용(錄用)하는 은전을 입었으며 시골의 선비들도 경렴서원(景濂書院)에 위패(位牌)를 봉안하고 제사를 받드니 임금과 선비들이 존숭(尊崇)하고 보답하는 전례(典禮)가 또한 갖추어진 것이다.

또 선생은 안팎의 자손이 번성하여 이루 수를 헤아릴 수 없고 명인석덕(名人碩德)이 무리로 나와서 이 나라의 이름있는 벌족(閥族)이 되었으니 하늘의 보시(報施)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리라.

선생의 자손이 경향(京鄕)에 흩어져 살고 있는데 혹시 선생의 옛 터가 세월이 오래되면 잃어질까 두려워하여 碑를 세워 표식(標識)하였으니 그 일을 맡아서 한 이는 명준(明峻)과 종화(琮和)이다.

옛날 정백자(程白子 : 程顥)의 안락정명(顔樂亭銘)에 “‘물도 차마 폐(廢)할 수 없고 땅도 차마 황폐(荒蕪)하게 할 수 없다’라 하였으니 아! 정학(正學)을 잊을 수 있으랴”하였는데 직필(直弼)도 또한 선생에게 이 말로 대신한다.

숭정기원 후 네 번째 병오(丙午 : 憲宗 12년 1846)년 4월에 당성(當城) 홍직필(洪直弼)은 삼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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